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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2회]Gungnir |
날짜 : 2014-06-09 02:54 | 조회 : 503 / 추천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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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공포] 속죄
속죄
- 「혹시 ○○중학교 졸업하신 이혜연씨 맞으세요?」 짧은 문장. 쓰는데 30초도 채 걸리지 않은 문장이지만 나는 마우스에 손을 올린 채 그 자리에 앉아 장장 30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앞으로 메일 전송 버튼만 누르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우스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이런건 긴장이라기보단 불안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올바를지도 모른다. 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달라지는 건 없다. 어서 빨리 결단을 내려야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우스 커서를 메일 전송 버튼 위에 올려두었다. 심호흡. 그 상태로 눈을 찔끔 감은 뒤, 다시 한번 심호흡. 폐에 들어온 공기를 이산화탄소로 바꾸어 전부 배출한 뒤, 나는 드디어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힘을 가했다. 딸깍. 그 상태로 10초. 천천히 두 눈을 뜬 나는 서둘러 모니터 화면을 살폈다. 「메일 전송에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보내고 말았다. 저질러버렸다. 이제와서 이런 짓을 하는게 어찌보면 조금 비굴할 수도, 한심할 수도 있었다. 사실이다. 모두 맞는 말이다. 애시당초 그녀와의 인연을 끊어버린 건 바로 나였다. 자기가 찬 여자를 잊지못해 4년만에 연락하다니. 꼴불견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아직 그녀를 잊지 못했고, 메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나버린 것을. * 좁은 단칸방의 벽면에 기대어, 작은 텔레비전에서 새어나오는 개그맨의 당찬 웃음소리를 들고 있었지만, 내 얼굴엔 전혀 미소가 띄워지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웃긴걸까. 솔직히 말해서 저 개그맨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냉정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저 개그맨은 한 물 간지 오래라고 생각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억지 웃음을 짓게 만드는 개그맨이 참된 개그맨일 리가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저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나 뿐일지도 몰랐다. 가끔가다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방청객들은 모두 웃음을 띄고 있었다. 나만 웃기지 않는걸까.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내 감정이 메말랐다기 보단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고 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3일이 흘렀다. 뜬금없이 찾아온 노스텔지아에 몸을 맡겨 그녀에게 메일을 보낸 지 어느덧 3일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까지 답장은 없었다. 메일을 보지 못한걸까. 어쩌면 메일을 잘 확인하지 않는 성격일지도 몰랐다. 뭐, 그런 여자는 흔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내 메일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답장을 하고있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다. 자기를 차버린 남자가 4년 후에, 그것도 갑자기 메일을 보내오다니. 아직 내 메일 주소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였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가 불평할 입장은 못됐다. 방금 한 말 처럼 그녀를 차 버린 것도 나고, 뜬금없는 향수에 휘말려 갑작스럽게 메일을 보낸 것도 나니까. 지금의 나로썬 주인에게 버려진 개 처럼, 한없이 상대를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다. 유머 사이트에 들어가서 베스트에 올라와있는 글을 하나하나 클릭해 살펴봐도 내게 웃음을 주는 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채 왜 이런 글들을 보며 웃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게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거야? 차라리 내 감정이 메말랐다고 해줘. 사이트를 끄고, 휴대폰의 바탕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진첩에 들어갔지만 그녀와 함께 찍는 사진 같은 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런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녀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 둘 걸. 한참동안 사진첩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표정을 찌푸리곤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선 방 안의 불을 전부 끈 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아직 대낮이었고 잠도 잘 오지 않았지만, 답답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억누르기 위해선 잠을 자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과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지 않는 잠에 들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많은 수의 양을 세었다. 그리고, 머릿속 울타리 너머의 양이 300마리에 가까워졌을 때 까지도, 그녀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 F “아, 미안 우리 집 강아지가 아파서 동물 병원에 대려다주고 오느라 좀 늦었어.”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어께에 손을 올리곤 연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약속 시간 15분 초과. 사실 그녀가 오면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한 소리 할 생각이였지만, 땀을 뻘뻘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럴 마음은 싹 가셨다. 어쩌면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수향에 묻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괜찮으니까 다음부터는 좀 빨리오라고. 계속 서있어서 다리 아파 죽겠다.” “미안 미안.”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싱긋 웃어보였다. 확실히 예쁘다. 그녀가 내 여자 친구라는 사실이 조금 자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흘러갈 것만 같았다. 둘이서, 함께. “그러고보니 집에 강아지 키웠었어?” 내가 건넨 아이스 티 빨대를 쪽쪽 빨고있던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전에 그녀의 집에 갔을때 강아지 같은 건 키우고 있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강아지를 분양 받은건가? 그녀의 아버지를 봤을때 결코 동물을 좋아할 인상은 아니였던 것 같은데. “비, 비밀이야.” 그녀는 시선을 회피하며 그렇게 말을 흘렸다. “그보다 얼른 가자고, 영화 시간 늦겠다.” 그녀는 재촉했다. 다 마신 아이스 티 곽을 근처 쓰레기통을 향해 내던지며,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그때 느꼈던 그녀의 손은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다. * “그러고보니….” 나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연락처가 띄워져 있었고, 검색창에는 ‘이혜연.’ 이라는 이름이 타이핑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검색 목록에는…. “있다.” 있었다. 이 혜연이라고 저장된 한 개의 번호가. 멍청하다, 왜 지금까지 이 걸 생각 못한거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번호를 지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휴대폰을 바꿀때에도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의 번호는 전부 그대로 옮겼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녀의 번호도 저장되어 있을게 당연하다. 왜 나는 컴퓨터의 메일 같은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에 치중해서 이런 걸 생각하지 못한거지? 확실히, 요즘시대에 컴퓨터의 메일보다는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가 더 눈에 띄기 쉬웠다. 나는 곧바로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번 역시 내용은 같았다. 「혹시 ○○중학교 졸업하신 이혜연씨 맞으세요?」 역시, 타이핑을 하는데엔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송 버튼을 누르는데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왜 이제와서. 이미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증명됐다. 애써 부정해도, 이제는 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왔다. 메일을 보내지 않았던가? 뭐, 5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난 지금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보내자.” 그렇게 결심한 나는 다시 한번 두 눈을 찔끔 감았다. 그리고 심호흡. 살짝 눈을 떠 내가 작성한 메일을 살폈다. 오타는 없는지, 맞춤법을 틀리진 않았는지. 좋아, 이걸로 확인 끝. 다시 눈을 감은 뒤, 한번 더 심호흡. 그리고 나는 천천히 전송 버튼이 있는 위치를 검지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그 상태로 10초. 눈을 뜬 나는 메일이 전송되었다는 휴대전화의 메시지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 없다. 여기까지 왔으면 그녀를 만나야만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 혹시 그녀가 번호를 바꾸진 않았을까? 확실히, 4년 전에 저장한 번호였다. 그녀가 휴대폰을 바꾸면서 번호를 바꿨을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뭐야, 그렇다면 난 지금 뭘 한거지. 괜히 혼자 고민하고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문자를 보낸건가. 젠장,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하지만 그 순간.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전화에 불빛이 들어왔다. 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휴대전화의 화면을 살폈다. 그리고 그 곳엔. 있었다. 왼쪽 상단에,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와, 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정말로 번호가 바뀌였을까? 「그런 사람 모릅니다.」 라는 문자가 와 있을 수도 있었고, 「아닌데요.」 라는 문자가 와 있을수도 있었으며, 「번호 바뀌였습니다.」 라는 문자가 와 있을지도 몰랐다. 제발,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것도 아니길. 내가 원하는 건 「네, 저 맞는데요.」 라는 대답이였다. 제발, 제발.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휴대전화는 드디어 문자의 내용을 화면에 띄우기 시작했다. 「네, 전데요.」 “어.” * F “진짜 미안! 강아지가 또 아파서 병원에 좀….” “거짓말하지마! 그럴 리가 없잖아. 맨날 약속이 있을 때마다 강아지가 아프다는게 말이 돼? 이게 대채 몇 번째야! 아니, 그것보다 너 강아지 안 키우잖아. 저번에 갔을때도 니네 집에 강아지 같은건 없었어.” 그 날은 조금 과했다. 약속 시간 1시간 초과. 슬슬 짜증이 나던 나는 폭발하기 일보직전 이였고, 그녀는 어김없이 그녀의 망상 속 강아지를 핑계로 내걸며 내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조금 진정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지각하는 건 그녀의 특기였으니까. 하지만, 또 다시 존재하지도 않는 강아지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들먹여지자, 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를 몰아세웠다. 내 목소리가 커지자, 그녀의 표정은 일순간에 어두워졌다. 이번에도 역시 적당히 잔소리를 하며 넘어갈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달랐다. 이때의 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일 뿐이였다. “솔직히 말해, 왜 늦었어?” “…늦잠 자서.”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한 시간이야. 한 시간동안 이 앞에 서 있었다고. 다른 커플들 다 팔짱끼고 영화관에 들어갈 때 나 혼자 멍하니 서서 시계만 보고 있었다고!” “미안….” “미안하면!” 짧은 심호흡.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만 바라보는 그녀와 나 사이에 감도는 적막과 냉전 속에 피어오르는 내 작은 한숨과 고함. “미안했으면 거짓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미안해….”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아니, 그것도 안된다면 이번엔 강아지가 아니라 다른 핑계를 대지 그랬어. 분노는 더더욱 솟아올랐고,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재, 재혁아….” 그녀가 울먹이며 뒤돌았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을 뒤로 한채, 발 끝을 쳐다 볼 뿐이였다. 길었다. 그 시간이. 마치 영원히 이 상태에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였는 듯, 어느덧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서 있던 장소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참을 걸 그랬다. 한번만 더, 마지막으로 넘어가줄 걸 그랬다. 이번에는 괜찮으니까 다음에는 늦지 말라고. 물론, 그 다음에도 그녀는 약속 시간에 늦었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날 만큼은 넘어갔어야 했다. 만약 그 일이 없었으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을까. 내가 그녀를 차버리진 않았을까. 고작 중학생 주제에, 그때의 난 왜 이리 시간에 엄격했던걸까.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나와 그녀가 다시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다. 헤어지자는 고백도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문자로 통보했을 뿐이였다. 그 뒤, 그녀에게서 문자와 전화가 수도 없이 왔었지만 난 그걸 전부 무시했다. 중학생 치고는 어른스러운 사랑…이라기보단 나 혼자 망상병에 시달려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어른이 된 것 같다며 착각하고, 말도 안되는 중2병을 변명으로,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인연을 끊었다. 일방적으로. 그녀의 말 따윈 전혀 들어주지 않은 채. * 「혹시 나 기억해?」 라는 문자를 보낸 건 2일 전이였다. 그리고. 「기억해.」 라는 답장이 온 것도 2일 전이였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 나와 그녀는 늦게까지 문자를 주고 받았다. 뭐, 대부분 나 혼자 지껄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말에 장단을 맞추고 답장만 할 뿐. 아직,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걸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내 쪽에서 잘못한 거니까. 확실히 약속 시간에 매일 늦은 건 그녀의 잘못이였고, 존재하지 않는 강아지를 핑계로 내거는 것도 그녀의 잘못이였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인연을 끊은 건 전부 내 책임이였다. 그렇기에, 지금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차가워도 나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4년만에 이렇게 다시 연락하는 것도 구차한데 더 이상 그녀에게 밉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 「뭐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해서.」 그 뒤, 빠르게 날아오던 답장이 조금 늦어졌다. 휴대폰의 문자를 바라보며, 지금 그녀는 대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 다 잊었어. 괜찮아.」 「미안해.」 「또 뭐가.」 「4년만에, 이렇게 뜬금없이 연락해서.」 「왜, 연락한거야?」 나는 타이핑을 멈췄다. 뭐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진실을 말할 뿐.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뭐야, 그냥 갑자기 내가 보고싶어졌어?」 「응.」 「ㅋㅋㅋ나랑 헤어지고 다른 여자랑 한번도 안 사귀었어?」 「응.」 「헐, 진짜로?」 「응.」 「뭐야 ㅋㅋㅋ 너 그렇게 나 좋아했었냐.」 「응.」 다음 문자가 전송된 건 그로부터 5분 후 였다. 「…그럼 그때 왜 헤어지자고 한거야?」 「모르겠어.」 「그냥 이제와서 생각하니까 후회된다는 거야?」 「그런가 봐.」 「나랑 똑같네.」 「응?」 「나도 후회했거든, 그때 조금만 더 전화해볼껄 하고.」 「진짜?」 「응.」 「나도 후회해, 그때 네 전화 받을 껄 하고.」 「ㅋㅋㅋ받지 그랬어.」 「그러게. 받을 껄 그랬다.」 「…받지 그랬어.」 「미안.」 거기까지 문자를 마친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베란다의 문을 열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곤 불을 붙혔다. 매케한 담배 연기가 폐 속을 찌르고 나오자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현실인걸까. 꿈이 아닌건가. 4년만에, 그녀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상황이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다가오자 무언가 답답하다. 나는 대채 그녀에게 연락을 해서 뭘 하려던 거였을까. 처음엔 그저 얼굴이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같이 밥도 먹으며, 영화도 보고, 웃으며 그렇게 기분 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일방적으로 얼굴도 보지 않고 헤어진 그때를 대신해, 지금 이렇게 마지막으로 추억을 만들곤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은 기분이였다. 하지만 이제와서 만나자고 하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염치도 없지, 4년만에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애써 서로 다 잊어가던 시점에서, 다시 그 날의 기억들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런 것보단 그녀의 얼굴을 보면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휴대폰을 살폈다. 그녀에게서 두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이럴게 아니라 우리 한번 만날래?」 「오랜만에 영화라도 보자ㅋ」 그 문자를 본 나는, 손에 들려있던 담배 꽁초를 베란다 바닥에 그대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 F 「미안해, 전화 받아봐.」 「앞으로 안 늦을게, 한번만 더 봐주면 안될까.」 「그거 강아지, 전에 인터넷에서 본 거였어. 늦을 때 그냥 늦잠잤다고 하는 것보다 그런 핑계를 대는게 상대방이 덜 화낸다고 들어서….」 「맞다, 우리 다음 주에 영화보러 가자, 오늘 보기로 했던거 너 엄청 보고 싶어했었는데 못 봤잖아.」 「재혁아 전화좀.」 휴대폰을 껐다. 수도없이 날라오는 그녀의 전화와 문자를 모두 무시한 채 두 눈을 감았다. 미안한 마음이 아예 안 든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섣불리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자존심.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고작 문자 몇 통 가지고 마음을 되돌리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헤어지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였다. 뭐, 사실상 그때엔 별로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채 1년이 지났고, 중학교에 들어서서 재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2,3 학년 모두 같은 반. 정말, 친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중학생 시절이 흘렀고, 중학교 3학년의 여름 방학 기간 중, 나는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녀 역시, 나에게 호감이 있었는지 내 고백을 받아주었고, 우린 그렇게 사귀기 시작했다. 학급 내에서도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교내에서나 교외에서나 우린 언제나 붙어다녔고, 부모님들도 웃으며 인정해주었다. 좋았다. 그저 좋았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서로의 관계는 식어가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 사이가 대체 왜 이렇게 되버린걸까. 후회스럽지만 다시 되돌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 자존심을 포기하고서라도,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서라도 그녀의 문자에 답했어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이때나 지금이나 서로의 관계를 전처럼 되돌릴 용기는 없었지만, 이때는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4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다. 되돌릴 용기가 있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 “오랜만이야.” “정말.” 4년만이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지. 약속 장소인 영화관의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내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도착했다는 내 전화를 받고서야 내 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이미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걸까. “아이러니한데.” “뭐가?” “내가 너 차버린 게 이 영화관이였잖아, 그런데 다시 만나는 장소가 이 영화관이라니.” “뭐, 너희 집 근처 영화관이라곤 여기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콜라 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콜라를 받았다. 콜라를 집어들자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차갑고, 묵직했다. 영화관에서 콜라를 마시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녀와 헤어진 뒤, 4년동안 한번도 영화관에는 오지 않았으니까.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표를 한 장 내게 내밀었다. 로맨스 코미디. 4년만에 만난 전 커플이 이런 영화를 함께 보는 건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순순히 표를 받아들곤 그녀를 따라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아직은 꺼낼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때 말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콜라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자리에 앉은 우리는 한동안 서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광고를 멍하니 바라볼 뿐.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누구라도 먼저 말을 꺼냈으면 좋을텐데. 그녀 역시 어색한 듯, 내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우린 말없이 콜라와 팝콘만 입 속으로 집어넣을 뿐이였다. 그렇게 우리 사이엔 적막만이 맴돌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렀고, 영화는 결말로 다다랐다. 영화의 줄거리가 뭐 였는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영화가 끝나고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 만이 굴뚝 같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가 언제 말을 걸어올지 긴장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번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걸까, 슬슬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검은 배경에 흰 글자만이 화면을 수놓았다. 관객들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나가기 시작했고, 난 여전히 자리에 앉아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바라볼 뿐이였다. 그러던 중,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중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직 안 졸리니?” “어?”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기 보단, 몸이 무거워졌다. 눈 앞의 시야가 흐려지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무슨 감각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잠이다. 대채 왜 이리도 졸린걸까. 자리에서 쓰러지며, 미미하게 남아있던 시선의 끝자락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얼굴엔 함박 웃음이 지어져있었다. 나는 손에 들려있던 콜라를 엎질렀다. * F 일주일이 흘렀다. 며칠간, 그녀에게서 문자는 오지 않았다. 3일 차 까지엔 하루에도 수십통 씩 문자가 왔었는데. 이제 그녀도 나 같은 건 잊어버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니아니, 난 정말 쓰레기같은 놈인 것 같다. 자기가 차버렸으면서, 그녀는 영원히 나를 잊지 않길 바라고 있는건가? 말도 안된다. 지나친 이기주의다. 화롯불에 구워져도 시원찮을 놈. 7일 째 저녁, 나는 여전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서 문자가 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하지만, 내 예상을 깨버리겠다는 듯, 휴대폰의 화면이 반짝였다. 왼쪽의 상단에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기대하진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이나, 흔한 스팸문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자의 발신인은 내 두 눈을 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발신인: 이 혜연 「미안해.」 마지막이였다. 그 문자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내게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건 정말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난 이때라도 그녀를 붙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무책임하게 시간은 흘러갔다. 4년이 지났다. 그로부터 4년. 길고도 긴 시간동안, 나와 그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개인의 인생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는 것 처럼. 한번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채 중학교를 졸업했고, 남자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근처의 괜찮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에도 내 곁엔 그녀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함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낸 한 마디가 여전히 담겨있었다. * “어디보자, 1억 4천에, 1억 7천, 신장이 3억 치고 들어가면….” “야, 이거 미현이 대박하나 건졌는데. 어떻게 구한거야?” “나도 몰라, 쟤가 먼저 나한테 연락했다니까?” 몽롱한 의식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온다. 좁다, 좁고 차갑다. 손 목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시선을 돌리니 내 손은 화장실의 세면와 수갑으로 이어져있었다. “아, 진짜 그렇다니까.” 닫혀진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맞아. 이건 혜연이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혜연이라고 밝혔던 그 여자. 아아, 결국 이렇게 되는건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예상이라기보단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 그녀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리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만난 건 중학생 때의 일이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 이상 나와 그녀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우연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저 여자의 얼굴은 혜연과 닮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혜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게 달랐다. 혜연이라면 퍼퓸 향수를 뿌리고 왔을거다. 혜연이라면 우리가 헤어졌던 이 영화관을 약속 장소로 고르진 않았을거다. 혜연이라면 로맨스 코미디가 아니라 액션 영화를 골랐을거다. 혜연이라면 콜라가 아니라 오렌지 쥬스를 구매했을거다. 혜연이라면 영화 표를 직원에게 건네는 건 내게 맡겼을거다. 혜연이라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전부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을거다. 혜연이라면…. 혜연이라면 나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는 않았을거다. 처음부터, 여자의 얼굴을 봤던 그 순간부터 이 자는 혜연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간 건 이게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될 운명이였다. 혜연의 번호를 차지하게 된 게 하필 이 여자 인것도 운명이였으며, 이 여자가 하필이면 장기매매를 주 업으로 하는 것도 운명이였을게 분명하다. 신의 장난. 아니, 그것보단 신의 벌 이라고 표현하는 게 올바를 지도 모른다. 자신이 차버린 여자를 잊지못하고 4년만에 다시 연락한 남자에게 하늘이 내리는 벌. 그걸 알기에, 나는 이 여자를 따라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 이런 속죄다. 그녀를 차버린 내가, 그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 그 순간이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뭐지? 하고 생각했지만 나는 곧바로 그게 휴대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휴대폰도 뺏지 않은 건가. 존나게 어설픈 장기매매 업자들이로군. 묶여있지 않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확인한다. 역시, 어설프다. 한쪽 손만 묶어놓으면 도망갈 수 없을거라고 생각한걸까? 뭐, 맞는 말이지만. 세면대를 떼어내거나 한 쪽 손을 자르지 않는 이상 도망갈 길은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한다. 이번엔 문자 메시지가 아닌,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와 있었다. 메일? 메일이라고? 그러고보니 대략 9일 전, 나는 저장되어 있던 그녀의 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라고 생각되는 사람, 아니 그녀를 사칭하는 장기매매 업자에게 문자가 와서, 메일 같은 건 기억의 뒷 편으로 넣어두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메일을 확인했다. 설마, 이번엔 정말 그녀인건가. 그럴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럴리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 그녀를 만나고 싶던 나는 장기매매 업자에게 몸을 파는 신세가 되었는데, 옴짝달짝 못하게 된 이 상황에서 진짜 그녀가 나타난다고? 그건 정말 기구한 운명이다. 하지만. 운명은, 하늘은 끝까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듯, 메일을 확인한 내 동공은 순식간에 확장됐다. 「아, 죄송합니다. 키우던 강아지가 아파서 메일을 볼 시간이 없었네요. 네, 저 맞는데. 누구신지?」 의미모를 웃음이 새어나온다. 정말, 하늘도 존나게 무심하시지. 왜 이제와서. 나는 여전히 실소를 터뜨리며 한 손으로 메일을 작성한다. 이번엔 전과 달랐다. 오타와 맞춤법 같은 걸 확인할 시간 같은 건 없었고, 문장을 다 완성한 뒤 메일 전송 버튼 위에서 갈팡질팡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 메일이 도착하길 바랄 마음이다.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른 그 순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곤,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야 씨발! 이 새끼 핸드폰 왜 안 뺏었어!” “아, 깜빡했다!” “씨발! 이 새끼 신고한거 아니야?” “멍청한 놈아, 신고해도 여기가 어딘지 알고 신고하냐?!” 소란스러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혜연이라고 자칭하던 여자도 눈에 들어온다. 기분이 좋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여자를 따라가지 않았을 것을. 정말이지, 너무 가혹한 운명이다.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봐, 씨발 새끼들아.” 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자, 녀석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새끼가 돌았나.” “야, 값 떨어지니까 참으라고, 그냥 재워, 야 수면제 가져와!” 여자가 수면제 몇 알을 남자에게 건네고, 남자는 그걸 내 입 속으로 강제로 투여한다. 물과 함께 섞여들어간 수면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 뒤로 넘어가고, 내 몸은 다시한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씨발, 다음 답장은 보고 싶었는데. 의식이 점점 멀어져만 간다. 이제 앞으론 다신 눈을 못 뜰지도 모르는데. 아, 다음부턴 안 늦는다고 해 놓고…. 「너무 늦으셨어요, 그보다 그 강아지는 여전히 자주 아프나보죠? 4년 동안 살아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네요.」 출처 ㅡ 웃긴대학 피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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